문화·문학

2011

《파리식물원에서 데지마박물관까지》

연도 2011
기간 2011. 2. 18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5-02-07
조회
3280


참석자: 강규한, 고형진, 김영미, 김원중, 김춘희, 박찬구, 손승현, 신문수, 이석호, 이영현, 이종찬, 황영심

장소: 미국학연구소 세미나실

  이 날 모임에서는 『파리식물원에서 데지마박물관까지』(해나무)의 저자인 이종찬 선생님(아주대 인문사회의학교실 및 열대학연구소)께서 여행기의 전반적인 내용과 함께 물(物)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자연사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 그리고 물(物)보다 말씀을 중시하였기에(이과형보다 문과형) 서구나 일본과 다른 사회 발전과정을 겪어 온 우리나라의 경우까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전달해 주셨다.

  “고생물학, 지질학, 광물학, 선사학, 민속학, 식물학, 동물학, 인류학이 융합된 복합적인 학문"이라는 자연사(自然史, natural history)의 정의(비엔나 자연사박물관)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사는 짦은 인류의 역사를 거대한 지질학적 시간의 틀에서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 자연사 박물관이 없는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은 일찍이 자연사에 지대한 관심을 두어 각 나라의 특색이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 건립에 힘을 쏟아 왔으며 과학자와 기술자가 사회적으로 높은 존경을 받아왔다. 저자는 유럽이 자연사에 관심을 갖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로 유럽인들이 17-8세기 바닷길을 통하여 낯선 ”열대“라는 공간을 만나게 된 점을 언급한다. 유럽인들은 자기들의 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을 가진 열대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자연의 기본 요소인 식물, 동물, 광물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열대의 자연을 하나하나 기록해 나가던 유럽인들은 열대의 다양한 산물들이 유럽사회에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들은 곧 열대를 서구의 식민지로 삼아 부를 창출하는 제국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열대의 온갖 자연물들을 유럽으로 가져와 만든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은 바로 유럽 문명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로서 저자는 열대가 유럽의 문명을 만들어 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동양 여러 나라들 중 드물게 일본도 유럽과 유사하게 구체적인 물(物)에 기반을 두고 사회를 조형해 나간 국가이다. 나가사끼의 데지마라는 인공섬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서양 문물(난학)을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박물학(자연사)와 의학같은 실용 학문이 일본의 문화를 선도하였고 이는 일본 사회의 과학과 기술 발전으로 이어진다.

  한편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당시 조선 사회는 성리학에서 비롯된 말씀 중심의 담론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문과형 지배담론 아래에서는 자연도 구체적 물질의 가치보다는 다분히 추상성을 띨 수 밖에 없었다. 과학과 기술이 발붙이기 힘든 사회였기 때문에 자연히 경제적 발달 또한 늦어질 수밖에 없다. 신선한 실용주의 바람을 일으켰던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도 사대부 출신이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지배 문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담론을 창출하기는 힘들었다. 우리와 일본의 이러한 문화적 의식의 차이는 당시의 지도(세계관의 차이)나 인체해부도(몸에 대한 관점의 차이), 시각 이미지에 대한 견해의 비교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책속에서 당시 조선 지배 계층이 적극적으로 물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받아들였더라면 지금 우리나라는 얼마나 달라졌을지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대부분의 세미나 참가자들은 평소 인식하지 못하던 문제들을 새로이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기에 이 책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복잡다단한 사회와 역사의 발전 과정을 문과형 이과형 담론으로만 환원하여 단정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즉 조선이 물질적으로 가난했던 주요한 원인을 물적 세계(과학과 기술)를 경시하였던 조선의 성리학적 담론으로 보는 이 책의 주장에 대하여, 비록 조선이 서구와 비교했을 때는 그러할지 모르지만 농경 사회의 기준에서는 보편적인 경제수준이라는 점, 그리고 서양의 물질에 대한 관심은 타자와 만날 수 있었던 특수한 사회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접촉이 없었던 조선이 물질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서 비판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점 등이 언급되었다. 또 조선은 서구와 달리 계급에 따른 빈부의 차이가 별로 없을 정도로 검소한 사회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의 긍정적인 기능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혁신적인 여행기답게 자유롭고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