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문학

2012

《제4세계와의 조우-북미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탐색하다》 / 아동문학에 형상화된 어린이와 동물-《샬롯의 거미줄》을 중심으로

연도 2012
기간 2012. 4. 20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5-02-19
조회
4112

참석자: 강규한, 김영미, 김원중, 손승현, 신문수, 이영현, 이종찬, 전가경, 황영심

장소: 미국학연구소 세미나실

  손승현 선생님(사진 작가)의 '제 4세계와의 조우 - 북미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탐험하다'와 강규한(국민대 영문과) 선생님의 '아동문학에 형상화된 어린이와 동물 《샬롯의 거미줄》을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두 강연이 있었다.

  손승현 선생님께서는 북미 원주민들의 카누 여행, 원주민 유적지인 아나사지(Anasazi) 문명, 그리고 그들의 전통 의례를 생생한 사진으로 보여주시면서 특히 자연과 인간의 교류와 소통 방식에 관심을 두고 이야기하셨다. 먼저 강연의 제목이기도 한 ‘제 4세계’는 첫째 역사적으로 박탈당하였고, 둘째 토지 청구권이 결부되어 있으며, 셋째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민족들을 일컫는 용어로서 “민족, 국가, 제도의 희생자이며 역사적으로 가장 상처받은 집단”이라 할 수 있다.(《제4세계와의 조우》 5) 이 세계에 속하는 북미 원주민들은 매년 열리는 카누 여행과 말 타기 의식 등을 통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살리고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전통을 보전해 나기기 위한 치열한 노력“(5)을 끊임없이 경주하고 있다.

  2009년과 2011년 총 2번의 카누 여행에 참여하셨던 손 선생님께서는 2011년 시애틀의 올림픽 반도에서 열렸던 카누 여행을 중심으로 말씀해 주셨다. 미국 북서부에 위치한 시애틀 주변에는 특히 원주민 부족들이 많이 거주한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에 원주민들은 토템폴, 가면, 카누 등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나무 공예를 발달시키며 자연에의 경배와 전통이 어우러진 독창적인 원주민 문화를 형성하였다. 전통적으로 교통수단이자 영적 도구로 사용되었던 카누는 모터보트의 등장으로 한때 사라질 위기를 겪었으나 1980년대 북서 연안 원주민을 중심으로 카누 문화를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다시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2009년도부터는 북미 원주민 뿐만 아니라 베링해, 알래스카, 하와이, 남태평양, 뉴질랜드, 호주 등 세계 곳곳의 카누 부족이 이 행사에 동참하여 현재는 제 4세계의 전지구적 축제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카누 여행의 참가자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출발하여 그해 지정된 날짜와 목적지에 모이게 된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많게는 한 가족이 70-80명에까지 이르는 카누 여행은 매일 기도하고 육체적 한계를 시험하고 선조를 이해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현장 학습의 장이다. 카누 몸체나 캠프에는 각 부족의 전통 문양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서 원주민들의 공동체 정신과 자존감을 느낄 수 있다. 손 선생님도 태양에 얼굴 피부가 벗겨지고 입술이 갈라 터지면서 하루 종일 노를 저어야 하는 강도 높은 카누 여행에 직접 동참하셨다. 전 세계 각 부족들이 일정기간 동안의 바다여행 끝에 그 해의 목적지에 상륙하면 그때부터 프로토콜이 열린다. 일주일간 열리는 프로토콜은 자기 부족의 존재와 문화를 알리고 춤과 노래를 선보이며 미리 준비한 선물을 선사하는 행사이다. 참가자들은 모든 부족들이 어울리는 화합의 장인 프로토콜을 통해 각 부족의 자존감을 드높이고 미래 세대에 자신감을 부여하면서 힘든 여행을 의미있게 마무리한다. 카누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한 참가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난다. “카누 여행의 의미는 잃어버린 것을 자신이 다시 찾는 것입니다. 그중 핵심은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다시 얻으려 애쓰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언젠가 죽겠지만 이들이 알고 있었던 것을 다음 세대에 가르쳐야 합니다.”(101)

  미국의 서남부 뉴멕시코, 아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지역에는 북미 최대의 원주민 문명인 아나사지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기원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아나사지 문명은 아시아로부터 베링해, 알래스카를 지나 북미 대륙으로 들어왔던 원주민들 중 일부가 건조하고 척박한 고원지대인 이곳으로 들어와 이룬 공동체로서 나바호 족과 아파치 족, 호피 족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양한 건축물을 지어올리며 1000년-1200년경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아나사지 문명은 원주민들이 곧 새로운 땅과 물을 찾아 흩어지면서 지금은 그들이 거주했던 푸에블로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진흙과 짚을 섞어 만든 어도비 벽돌로 지은 어도비 양식의 건축물을 푸에블로(사람, 마을을 뜻하는 스페인어)라고 하는데 여러 사람이 한 건축물 안에 살아갈 수 있는 공동주택의 개념이다. 푸에블로는 주변의 다양한 지질과 식물들의 생태적 다양성을 고려하여 주어진 장소를 최대한 이용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출입구나 대문이 따로 없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건물이다. 이는 거친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위해 고대 원주민들이 이 땅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배려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뉴 멕시코의 차코 협곡(Chaco Canyon)에 위치한 아름다운 마을 푸에블로 보니또(Pueblo Bonito)를 비롯하여 콜로라도의 절벽을 따라 지어진 메사 베르데(Mesa Verde), 뉴멕시코의 리오그란데 강 일대, 유타와 아리조나의 접경 지역인 카옌타 지역, 아리조나 플래그스태프 인근의 우파키 유적, 피닉스의 몬테주마와 살라도 마을, 아리조나 북부 포코너스 인근의 나바호 보호구역 내의 캐인언 드 셰이 등의 16지역에서 아나사지 문명을 만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해 온 북미 원주민들은 자연에 감사하는 전통 의례가 많다. 나바호 부족은 추수를 하는 가을이면 마을 전체 사람이 9일 동안 예비체이(Yei Bi Chai)를 거행한다. 예비체이는 성스러운 신의 하나인 ‘예이(Yei)‘를 부르며 춤과 노래 챈트를 행하는 일종의 추수 감사 의례이다. 마을 사람들은 예비체이를 통해 신체적 영적인 쇄신과 내년에도 좋은 계절이 오기를 기원한다. 호피족의 경우는 코코펠리(kokopellie, 호피 족 인디언의 신으로 풍요, 다산, 음악, 춤 여행의 상징)를 나타내는 카치나 인형을 통해 풍요로운 삶과 풍성한 수확, 비와 건강을 비는 의식을 올린다. 그 외에도 이로쿼이 족의 추수감사, 라코타 수우족의 선 댄스(Sun Dance) 등 각 부족들은 문화에 따라 특색있는 전통 의례를 지낸다.

  한편 원주민 소년 소녀들은 성장의 과정마다 부족 공동체가 마련한 통과의례를 거친다. 각 부족의 통과의례는 자연, 문화적 환경에 따라 매우 다양하나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성인 남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말 타기와 사냥을 하고, 여성은 월경 주기에 맞추어 묵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비옥한 대지 어머니와의 재결합을 준비하는 휴식을 취한다. 이러한 여성의 의식 중 나바호 족의 사춘기 통과의례로 키나알다(kinaalda)가 있다. 키나알다는 월경을 막 시작한 소녀의 가족이 가까운 친지와 함께 4일 동안 행하는 전통의식으로서 소녀는 진정한 여성이 된 것을 축복받고 어른으로부터 성인 여성이 가져야 할 가르침을 받는다. 이 의식을 행하는 동안 주인공 소녀는 머리 모양과 옷을 바꾸어 새로운 여성으로 태어났음을 알리고, 달리기를 통해 신체를 건강히 단련하며, 태양을 상징하는 옥수수 케이크를 굽고, 새롭게 부여받은 치유의 힘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비록 요즘은 생활이 대부분 현대화되었긴 하지만 아직도 많은 원주민들이 예비체이나 키나알다 같은 부족 고유의 전통 종교 의식을 통해 정신적으로 큰 위안을 얻고 있다.

  토론 시간에는 먼저 하와이나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안 부족이나 뉴질랜드의 마우이족을 포함하여 전 지구적인 축제로 발돋움 하고 있는 카누 여행의 의의가 좀 더 자세히 설명되었다. 그리고 북극의 주민들과 나바호 원주민들에게서 확인된 언어의 공통점(동일한 몽골리안이라는 증거), 시애틀과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지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토템폴, 자연적 환경 덕분에 올림피아 반도 쪽에 토템폴을 만드는 목공실이 많은 점, 최근에는 원주민보다 백인들이 토템폴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는 점 등이 함께 논의되었다.

  두 번째 강연에서는 교훈과 상상의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는 아동 문학의 이중성을 살펴보고 이 중 후자인 상상적, 전복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샬롯의 거미줄》을 함께 읽고 논의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전래되던 민담이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개작되면서 시작된 유럽의 아동문학은 전통적으로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교훈적 충동과 현실을 뛰어넘는 판타지 세계의 전복적 충동이 늘 공존해 왔다. 이런 아동문학의 이중성은 근대 아동 개념의 구축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아동을 단순히 성인의 축소판에 지나지 않은 인간으로 보았던 중세, 그리고 아동을 타고난 원죄 때문에 구원 받아야 할 어린 영혼으로 보았던 청교도적 관점을 거쳐, 근대에는 아동을 이성과 도덕 교육이 필요한 백지상태로 파악하였던 계몽주의적 아동관이 발달한다. 계몽주의적 아동 개념은 세상을 이해하고 성숙을 도모하도록 어린이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아동문학의 교훈적 성격을 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편 아직 순수함을 간직한 자연 상태에 있는 아동을 어른의 아버지로 보았던 근대 낭만주의 전통은 계몽주의적 전통과는 상이한 또 하나의 아동 개념을 형성하면서 기존 질서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눈으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아동문학의 전복적 충동의 근원을 이룬다.

  《샬롯의 거미줄》 또한 교훈성과 상상이 함께 녹아 있는 아동문학 작품의 전형이다. 1952년에 출간된 이 책은 뉴베리 아너상(Winner of the Newbery Honor Medal)을 비롯한 수많은 아동문학상을 수상했고 현재까지 23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4500만권 이상 팔린 아동 문학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샬롯의 거미줄》의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는 탄탄한 플롯이 주는 텍스트적 요소, 동물들 간의 우정과 조건없는 사랑이라는 감동적인 교훈뿐만 아니라 동물과 어린이의 기상천외한 상상의 세계 속에 내재한 기존 어른의 통념을 뒤집는 전복적 요소에 크게 힘입고 있다고 평가된다. 소설의 서두인 “아빠가 도끼들고 어디가시는 거죠?”에서부터 이미 작가는 약한 무녀리 돼지새끼는 일찌감치 도끼로 없애는 것이 당연하다는 어른의 통념과 생사의 문제는 모든 생명체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탈인간중심적인 어린이의 관점을 대조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어른의 관점에 대한 문제 제기는 동물 이름이 더 사람 같은, 인간과 동물의 위계가 전도된 명명법(사람 이름은 애러블(Arable : 경작할 수 있는)이나 펀(Fern : 양치식물^^)인데 비하여 돼지는 윌버(Wilber), 거미는 샬롯(Charlottes), 쥐는 템플튼(Templeton))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 소설의 상상의 세계는 여덟 살 여자아이 펀, 그리고 헛간에 사는 다양한 동물들의 관점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비록 펀은 적극적으로 동물들의 세계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어른 세계로 동화되지 않은 아이의 관점에서 생명 그 차체로서 동물들을 응시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이해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펀과 동물들이 서로 교감하는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펀이 말하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며, 샬롯의 거미줄에 나타난 “대단한(terrific)”, “빛나는(radiant)”, “겸손한(humble)” 이란 글자(시중에서 의미없이 떠도는 광고에서 가져온 글자)때문에 실체와 상관없이 윌버에게 그러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기존의 통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기표를 맹신하는 언어 사용자로서의 인간/어른의 한계를 확인시켜 준다.

  돼지 윌버와 거미 샬롯의 관계 변화는 이 작품을 발전시키는 중심축이면서 동시에 인간/어른의 관점이 얼마나 일방적인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친구가 없어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윌버 조차도 거미 샬롯이 벌레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는 끔찍한 사실 때문에 처음에는 선뜻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점차 윌버는 샬롯 덕분에 세상이 벌레로 들끓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거미가 실상은 윌버 자신을 살리기 위하여 신의를 다하는 아름답고도 현명한 진짜 친구임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이러한 윌버의 관점 변화는 거미에 씌워진 징그럽고 무서운 이미지는 결국 인간중심적인 관점의 한계일 뿐 세상은 그것보다 더 큰 생명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윌버와 샬롯의 관계뿐만 아니라 펀과 다른 동물들의 교감의 장으로 설정된 ‘헛간’은 기존의 인간/어른 중심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생태계의 실제 작동원리가 제시되는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우선 헛간은 생태계의 기본 매커니즘인 생명과 죽음의 원리가 저변에 깔려 있고(무녀리로 태어난 윌버가 고비 고비 죽음을 모면, 거위와 양의 새끼 부화, 샬롯이 죽어가며 남긴 알주머니에서 아기 거미들이 태어남), 봄에 시작되어 여름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으로 끝맺는 계절적 순환구조를 따르며, 동물들 서로의 다양한 종의 차이가 인정되는 공간(돼지, 거미, 쥐의 능력은 각각 다르며 공동체에 그 나름의 기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헛간은 인간의 도덕이나 양심과는 전혀 관계없이 생명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 원리의 공간이다. 따라서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이기적인 템플튼도 헛간 공동체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고, 샬롯이 윌버를 구해준 이유도 우정이나 사랑의 발로가 아니라 돼지 냄새나 여물이 벌레를 잘 꼬여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잣대와 생명체의 매커니즘은 구분해서 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동물들 간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이 책의 교훈을 사실상 뒤집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어른/인간의 관점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어린이와 동물의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는 점, 그리고 소설의 주요 무대인 헛간 공동체가 모든 생명체들의 실제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공간으로 이해될 소지가 충분하다는 점에서, 《샬롯의 거미줄》은 기존의 아동문학이 가지는 인간중심적인 교훈성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그것을 뒤집는 전복적 비전, 더 나아가 인간/어른의 관점이 투사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동물의 세계와 조우할 가능성을 펼쳐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토론에서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동물 세계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응시로만 일관하는 펀의 수동성, 그리고 점점 동물에서 소년(인간)으로 옮겨가는 펀의 관심 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주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펀이 본능 세계를 넘어 상징계로 들어가게 되면 자연(동물)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서서히 단절될 수 밖에 없다는 점, 인간의 성장 과정 중 또래 소년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가장 인간적이며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점, 동물 대 인간의 단순한 이분법적 관계를 넘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변화까지 포착한 섬세함이 돋보이는 소설이라는 점 등이 논의되었다. 다음으로 윌버를 구하려는 여러 가지 노력들은 결국 자기 먹이를 확보를 위한 본능이므로 우정이나 조건없는 사랑 같은 교훈으로만 환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점, 그리고 이 작품을 무조건 교훈적으로만 읽어내는 우리의 작품 수용양상은 우리나라의 생태지수가 여전히 낮음을 반영한다는 점이 언급되었다. 제목에 나온 그물(web)이라는 단어는 생명의 그물을 연상시켜 작품을 생태적인 시각으로 읽을 수 있게 한다는 점, 어른에 의해 창작되는 아동문학이 아동의 내면세계를 진정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아동문학의 불가능성도 함께 제기되었다. 한편 1950년대 반공주의 및 미국 예외론이 대두되었던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작품의 배경인 헛간을 생태학적 공간보다는 정치성을 띈 생태학적 실험실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신화 중심인 유럽의 아동문학과 달리 자연이나 동물과의 교감을 주요 모티프로 하는 미국의 아동문학은 정치적인 관점보다는 미국문학 고유의 생태적인 특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