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문학

2013

《어느 나무의 일기》 / 생태 중심적 사회체제로의 전환과 문학

연도 2013
기간 2013. 1. 11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5-02-19
조회
3736

참석자: 강서정, 고형진, 김길중, 김영미, 김춘희, 신문수, 안영자, 이도원, 이선주, 한미야, 황영심

장소: 미국학연구소 세미나실

  세미나는 김춘희 선생님과 신문수 선생님 두 분의 발제로 진행되었다. 먼저 김춘희 선생님께서는 『어느 나무의 일기』 (Didier van Cauwelaert 작, 이재형 역, 다산북스, 2012)에 대해 발표하셨다. 김 선생님은 현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이 책이 발표된 2011년은 공교롭게도 유네스코가 ‘세계 산림의 해’로 선포한 해로서 프랑스 유네스코 지부가 이 소설의 출판기념회를 ‘세계 산림의 해’ 공식 프로모션 행사에 포함시켰다는 등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발표를 시작하셨다.

  선생님은 ‘트리스탕’이라는 수령 300년이 넘는 나무의 시각에서 서술되는 프랑스의 역사와 나무의 삶을 생태학적 의미와 한계를 중심으로 문제제기를 하셨다. (서술자 배나무가 ‘트리스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다른 한 그루의 배나무와 함께 한 쌍으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인데, 집주인이었던 오페라 가수가 ‘이졸드’의 역할을 사랑한 나머지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한 쌍의 배나무를 보고 ‘트리스탕’과 ‘이졸드’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사실 배나무는 암수 한 몸이기 때문에 암컷과 수컷의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이름붙임부터 인간적 시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김 선생님은 이 작품이 살아있는 존재와 살아있지 않은 존재의 경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비생명체에도 생명체와 똑같은 가치를 부여하며 비생명체와 생명체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선생님은 생태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생태학이 아무리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고자 하더라도 ‘지구’라는 관심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과, 최근의 생태학의 관심이 기존의 모든 생명체의 관계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윤리적 관심으로 변질되면서 도그마로 변할 위험이 있는데, 이 작품은 생태학적 관심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셨다. 선생님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트리스탕이 씨앗의 발아를 통해 다시 삶으로 회귀하는 듯한 이야기로 마무리 되는 결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셨다. 이어지는 토론에서 다음과 같은 논의가 있었다.

 

1) 이 작품은 구성이 매우 치밀하고 교묘한 작품으로 한 축으로는 나무가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나무의 자서전 형식을 띠면서 다른 한 축으로는 나무가 증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즉 프랑스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의 인간 군상의 숨겨진 역사를 담아 두 이야기가 겹치고 있는 작품으로 작은 에피소드를 끌어들여 교묘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설’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한 대단히 프랑스 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은 나무의 시각에서 나무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나무의 삶을 자세히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생태적이며, 다른 한편 시간을 거슬러 나무의 역사를 올라가며 이에 관계되는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매우 정치한 짜임새를 보이는 작품이다. 인간 주인공 야니스가 나무에 대한 글을 쓰는 과정을 기술하면서 소설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메타 픽션이라 할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이 작품은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2) 트리스탕은 마농에 의해 조각상으로 완성된 후 나무로서의 의미가 고양되는데 이는 ‘나무는 죽은 후 더 풍요한 삶을 산다’고 『나무의 죽음』에서 지적한 차윤정 선생님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3) 이 작품은 세대를 이어가는 생명의 연속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무의 입장은 ‘포기’보다는 ‘체념’으로 서술될 수 있을 것 같다.

4) 씨앗은 자신을 먹는 동물과 교감한다. 예를 들어 도도새의 배설과정을 거쳐야만 싹이 트는 씨앗이 있었는데 도도새가 멸종되면서 더 이상 그 씨앗은 자연적으로 싹이 트지 않는다. 짐승의 포식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싹을 틔우는 식물의 경우, 씨앗과 동물 사이에 상호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어 신문수 선생님은 최근 논문인 <생태중심적사회체제로의 전환과 문학>에서 생태중심적 사회 구축을 위한 토대마련을 위한 기획으로 우리 삶의 변화를 다음 세 측면에서 제안하셨다. 첫째,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자아를 재정립하고 둘째, 장소성을 회복하고, 셋째 생태문해력을 함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생태적 자아’란 근본적으로 ‘관계적 자아’로서, ‘관계’란 상호 이해와 인정 그리고 상생 협력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 보존의 필연성에 따라 다른 존재자 전체를 포괄하는 대자아로의 확장을 지향하기 때문에, 존재의 자기실현은 필연적으로 나뿐만 아니라 타인의 잠재적 가능성 계발에도 동참할 것을 요청받는다. ‘생태적 자아’란 당위가 아니라 생존의 요건으로서 협소한 차원의 ‘나’를 넘어서 타인의 복리와 필요를 존중하는 자세로 내 삶을 정립하고 생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의미한다. 둘째, ‘장소성의 회복’이란 생물지역주의나 재거주운동과 관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생물지역주의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획한 생활 단위를 지형, 기후, 식물상 등을 고려한 자연사적 관점에서 새롭게 구분하고, 이런 생물지리학적 지역의 특수성과 고유한 형편에 최적인 생활양식을 자연을 통해 배워 실천하자는 운동(8)이다. 재거주운동은 문명에 의해 손상되고 파괴되어온 땅으로 돌아가 ‘터에서 살아가기’(living-in-place) 방식을 배우며 그곳의 정착민으로 자리 잡는 것(9)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생태문해력’은 자연생태계의 질서와 운행을 이해하고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보살피며, 심미적 감수성과 구체적 실천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처럼 인식과 실천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생태중심적 사회로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발표였다. 이어지는 토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의가 있었다.

 

1) 생태주의의 미래는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비관적이다. 우리 삶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한다.

2) 지속가능한 지구를 향한 ‘공동의 목표’를 공유해야 한다.

3) 윤리적 차원이 아닌 자기 본능의 발현으로서 생태적 관심이 지속되어야 한다.

4) 세계화의 시대에 장소성의 회복이 중요하다.

5) 인간의 여러 지능 중에는 자연친화지능, 즉 생태문해력에 대한 지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