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문학

2015

한국의 선시 / 근본불교의 가르침과 세 가지 수행

연도 2015
기간 2015. 10. 2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5-10-04
조회
3552

가자: 강규한, 김상일, 김유중, 김원중, 김종철, 남진숙, 마나삐까 스님, 박지향, 변기준, 신문수, 안로라, 이규인, 정연정, 최우혁, 한미야

장소: 미국학연구소 세미나실

   먼저 김상일 선생님은 한국의 선시라는 제목으로 선시(禪詩)의 의미와 우리나라 선시의 네 갈래를 안내하였다. 서산대사는 선()의 개념을 교()개념과 대비하여, “마음과 뜻과 앎이 미치는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교()라 하고, 마음과 뜻과 앎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참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선()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선의 영역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초월한 상태를 지칭한다. 선시(禪詩)에 대해 엄우(嚴羽)는 지식과는 상관없는 묘오’(妙悟), 신비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선도’(禪道)와 본령이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言有盡而意無窮’, 말을 다했는데도 끝은 끝이 없이 나온다는 한탄은 언어의 세계를 초월하는 선의 경지와 이를 언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선시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깨달음은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사라지는데, 남는 것은 언어밖에 없다는 것이 선시의 딜레마이다. 이를 박한영(朴漢永,1870-1948) 스님은 지극한 도는 말로 형용할 수 없다고, 그러나 먹물에 실려 말로 드러내게 되면, 스님들은 그것을 선게(禪偈)라 하고, 세상 사람들은 시가’(詩歌)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선과 시가 결국 하나의 길로 통하는 것이다(至道無言,不繫詮表,旣載副墨,以道之,出世者曰禪偈’, 在世者曰詩歌.’ 然禪與詩, 及到上乘’,若無異轍焉已. <頭輪山草衣禪師塔銘記陰>, 石顚文鈔).

   우리나라의 선시는 대략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1) 깨달음의 희열을 자연발생적으로 보여주는 오도시(悟道頌) 2) 스승이 제자에게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시법시(示法詩) 3) 이생[此生]을 마무리할 때 쓰는 열반시(涅槃頌) 4) 중생을 향해 계도하기위한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시가 그것이다. 위의 네 갈래로 분류되는 수많은 선시 중에서 성철 스님의 열반송을 묵상해 본다.



일생동안 사람들을 속여서/

그 죄업 수미산을 지나 하늘에 가득하니/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질 일 한스러운데/

벽산에 지는 해 붉게 토하며 걸려있네.

(生平欺誑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다음으로 마나삐까 스님의 근본불교의 가르침과 세 가지 수행에 대한 말씀이 있었다. 근본불교는 해탈의 경지가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마음의 평정은 우리 마음속에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할 때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이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좋지 않은 행위를 일체 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좋지 않은 행위에는 살생이나 거짓말, 욕설와 같은 적극적 의미의 악행뿐만 아니라, 주어진 때가 아닐 때 움직이는 것이나 내용이 없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은 우매함도 포함된다.

   우리 안에서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세 가지 단계의 수행을 지속해야하는데 그것은 계율을 지키고’, ‘집중하며 지혜를 터득하는 과정이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1) 생명 있는 것을 죽이지 않고, 2) 남의 것을 훔치지 않으며, 3) 성욕이나 식욕과 같은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4) 정직하고 진실하며, 5) 술에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집중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매사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파도치는 바다에 달빛이 비치지 않고 물이 고요해졌을 때야 비로소 달빛을 담아낼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즉 우리 마음이 고요해 졌을 때 지혜의 달빛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집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마음을 한 대상에 모으는 일, 즉 마음을 가라앉혀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인식에 이르는 상태이다. 또 다른 집중은 위빠사나, 그러니까 마음을 대상의 특성에 몰입시켜 실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찰나에 사라지는 대상에 마음을 모으는 수행을 계속할 때, 궁극적으로 번뇌를 제거하여 존재하는 현상들의 법칙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위빠사나의 수행 과정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위해 우리 주위의 가장 분명한 대상, 물질 현상에 집중해야 한다. 물질 현상이 , , 열기의 정도,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 우리의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것은 바람, 즉 공기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하나의 예로서 위빠사나 수행은 호흡에 마음을 집중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통의 원인과 결과를 묵상하고, 이 과정에서 번뇌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지혜의 눈으로 통찰하고 번뇌의 원인들을 제거해 간다. 불만이나 고통 같은 인간의 눈을 가리는 어리석음을 통찰하고 이를 수행을 통해 제거할 때, 세상과 나의 경계가 없어지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이는 우리의 가능성을 최대한 확장시킬 수 있는 착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 세상의 보편적 진리와 합일되는 마음의 상태이다. 이를 위해 인간의 수행은 쉼없이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