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문학

2016

통영 탐방 - 박경리 문학 심포지엄 및 통영 문화예술 탐방

연도 2016
기간 2016. 10. 15-16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6-10-17
조회
3763

참석자: 

생태문화연구회 - 강진숙권영자김여진,김영미김원중김종인박지향박찬구신문수이길순이규인이덕화이영현정현숙 

토지학회 - 김종회김현주박은정박진임서현주우한용유호전이승윤이태희장미영조윤아진영복최유찬최혜림함정임 

장소: 경상남도 통영



주말 아침 일곱 시 서초구 양재역 십이 번 출구 대로변에 길게 늘어선 전세버스들을 따라 외교안보원 앞을 지나니 드디어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권영자 선생님과 신문수 선생님그리고 사모님이신 이길순 선생님께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그리고 곧 이덕화 선생님께서 오셔서 회원들을 정겹게 맞아주셨습니다가깝게는 강남멀게는 인천에서 모인 회원분들이 빠른 걸음으로 차에 올라타자 버스가 출발합니다이번 탐방길 사회를 맡은 토지학회의 이승윤 선생님께서 인원수를 꼼꼼히 세었고현 토지학회의 회장이신 김종회 선생님께서 즐거운 여행이 되길 빈다는 취지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여행길을 더불어 신문수 선생님 내외분께서 준비해주신 뜨끈뜨끈한 콩설기정사각형 지퍼백에 다소곳이 담긴 귤과 간식거리물로 아침을 나름 든든히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버스가 대전을 지나 통영-대전 중부고속도로를 달린지 약 다섯 시간 후인 열두시 무렵에 통영시에 접어들었습니다. “동백기름김”, “거북당 꿀빵”, “풍수지리 컬설팅과 같은 이색적인 간판을 지나고 저희가 내린 곳은 오찬 장소인 대풍관 앞입니다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대부분의 회원들은 식당으로 접어드는 골목길 입구에 세워진 김춘수 시인의 시 이 새겨진 시비를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 하셨습니다대풍관에서 멍게비빔밥과 바지락비빔밥그리고 반찬으로 나온 굴튀김과 꽃게탕을 먹으며 우리가 통영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경리 심포지엄이 열리는 동호동의 통영시민문화회관으로 이동하였습니다이번 심포지엄은 통영시에서 후원하는 제 1회 박경리 심포지엄으로 제 36회 통영예술제의 일환으로 열리는 행사입니다통영시는 수산업으로도 유명하지만음악가 윤이상화가 전혁림시인 김춘수유치환극작가이자 소설가이신 유치진그리고 소설가 박경리 등의 걸출한 예술인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김종회 토지학회 회장님의 말씀으로 심포지엄이 시작되었습니다곧바로 전 토지학회 회장이신 최유찬 선생님평택대 교수이자 생태문화연구회의 회원이신 이덕화 선생님가톨릭대의 조윤아 선생님의 기조발제가 순서대로 이어졌습니다이번 심포지엄의 주제는 박경리 문학과 통영입니다최유찬 선생님께서는 박경리 문학에서 통영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박경리 선생님의 작품에 통영이 원형적으로 나타남을 주장하셨습니다박경리 선생님의 계산과 전도와 같은 초기작품의 경우 통영에서의 작가 자신의 경험이 주요한 소재가 되는데 후기 소설인 표류도와 토지에서는 초기작품에서 나타나는 개인적 차원의 자기표현이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됩니다최유찬 선생님께서는 삼대에 걸친 사랑이 이야기를 통해 작품의 인물이 지혹은 의를 추구하는 인물로 유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그리하여 작품의 보편성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셨습니다그리고 이러한 인물의 유형화와 역사적 상관관계의 탐구는 당시 유행하던 소련의 여류작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작품 3대의 사랑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끝으로 최유찬 선생님께서는 작가는 통영을 떠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늘 당신의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다생명의 존엄을 지키고 키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은 생명사상의 장엄한 지고의 명제이다그 명제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미륵산 산마루에 터를 잡은 작가는 오늘도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한려수도의 뭍섬을 기르는 바다를 그윽한 눈길로 굽어보고 있을 것이다.”(최유찬 11)라고 박경리 선생님께서 살아계신 동안에 선생님과 맺어온 인연을 바탕으로 하여 박경리 선생님과 통영’, 그리고 박경리 선생님의 생명사상에 대하여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하셨습니다다음으로 이덕화 선생님께서는 박경리 작품에서의 고향의 변모 과정이라는 제목으로 박경리 작품에서 나타나는 고향의 의미와 그 변모 과정에 대하여 발표하셨습니다박경리 선생님의 초기 작품인 불신시대전도암흑시대와 같은 작품에서 인물들은 현실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내면세계로 침잠하고 소통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존엄성에 대한 강한 집착을 합니다이는 타자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엮어지는 현실을 그리기보다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파생되는 긴장에 대한 자기감정”(이덕화 12)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그 후 작가는 가난이나 가부장적 폭력과 같은 보편적인 이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김약국의 딸들노을진 들녘영원한 반려가 대표적입니다김약국의 딸들은 성수의 어머니를 사모하던 나그네가 아버지의 칼에 맞아 죽고 어머니마저 자살을 하여 집안이 망하게 되는 이야기로 가부장적 폭력을 여실히 보여줍니다작가는 이러한 인물들의 비극적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낭만적 사랑을 제시하지만 이 역시 좌절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왜냐하면 이들이 꿈꾸는 낭만적 사랑은 원초적인 경험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으로 이는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인물들의 내면의 고향은 토지』 3,4,5부에 와서 비로소 능동적 공동체로 확장됩니다. “가족과 같은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사회”(21)가 그것입니다이것이 바로 박경리가 말하는 고향이라고 이덕화 선생님의 설명이셨습니다이어서 조윤아 선생님께서는 화해와 연민의 생명사상박경리 토지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박경리 선생님의 생명사상에 대하여 발표하셨습니다선생님에 따르면작가의 토지』 집필 계기는 풍년이 든 노란 벌판이 있어도 호열자가 나돌아 그것을 베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외가의 먼 친척뻘에게서 들은 이야기에서부터였다고 합니다이에 조윤아 선생님께서는 본래 토지가 죽음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이러한 성찰이 깊어져서 생명에 대한 사상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선생님께서는 박경리 선생님의 생명사상을 모든 생명즉 인간뿐만 아니라 생사를 되풀이 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연민에서 비롯한다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우여곡절의 사연이며 살기 위해 죽이지 않을 수 없는 모순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서 마주치게 되는 경외와 연민이다.”(조윤아 50)라고 정리하셨습니다그리고 작품에 작가의 생명사상이 나타나는 장면으로 꾀꼬리 새끼를 살리기 위해 여치의 목을 비틀어 죽이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는 장면을 드셨습니다이 외에도 오만하고 도도해 보이는 서희가 모성을 발휘하는 장면자신의 자녀가 아님에도 그들을 친자녀처럼 거두어 키우는 인물들을 예로 드셨습니다.

 

새끼새는 제법 털에 윤이 나고 노랑과 검정의 빛깔도 선명해졌다. ‘나리야?’하고 부르면 여전히 삐욱!’하고 대답을 했고 방을 오래 비웠다가 돌아오면 횃대에서 뛰어내려 너무 기뻐서 입을 벌린 채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는데 참으로 열광적인 애정의 표시였다.그런데 하나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무수한 살생을 자행하게 되는 것은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이거니와 한 마리의 꾀꼬리새끼를 키우기 위해선날개가 상한 한 마리의 벌을 위해 슬퍼하던 길상도 매일 살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리고 하찮은 미물에게조차 각기 다른 성정이 있는 것을 알았다여치란 놈도 그 성정이 각기 다른 성싶었다아주 지독히 반항하는 놈이 있었다새 주둥이 속에서도 결사적인 투쟁으로 먹지 못하고 내뱉는 일이 번번이 있었는데 이럴 때는 여치의 목을 비츨 수밖에 없다.

나무아미타불!”

목이 비틀린 여치를 새 입에 넣어주고 다시

극락왕생하여라.”

하는 것이다. (토지』 4솔출판사, 1997, 160-64.)

 

  기조발표가 끝나고 문답시간과 토론이 이어졌습니다서울대 명예교수이자 소설가이신 우한용 선생님께서는 로 인물을 유형화하는 것이 해석의 유연성을 해칠 우려는 없는지박경리 선생님이 3대의 사랑을 수용했다는 전거가 무엇인지그리고 통영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서울대 교수이자 생태문화연구회의 회장이진 신문수 선생님께서는 토지』 2부 끝에서 이루어지는 서희의 귀향의 의미와 삶의 근거지로서의 토지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인천대 이승윤 선생님께서는 소설가 박경리와 시인 김지하가 말하는 생명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답변 내용은 생략합니다.

  발표가 끝나고 향한 곳은 미륵도에 있는 도남동입니다우리는 이곳에 한라수도 조망 케이블카를 타러 왔습니다미륵도는 통영시 남쪽에 있는 섬으로 두 개의 다리와 해저터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케이블카를 타고 걸어서 약 삼십 분 후면 미륵산 정산에 도착하게 됩니다미륵산정상과 중간의 대여섯 군대의 쉼터에서 약 15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한려수도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저희가 방문한 첫날은 날씨가 매우 맑아서 대마도를 제외하고 지도에 표시된 한산도좌도송도와 같은 대부분의 섬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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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미륵산에서 본 한려수도 모습

  

  올라갔던 길로 다시 내려와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박경리 기념관입니다박경리 기념관은 미륵도 산양읍에 있습니다저희가 케이블카를 탄 곳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기념관은 여섯시에 문을 닫는데다행히 저희는 한 시간 전쯤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선생님 묘소를 둘러보고 기념관 전시 작품을 보는 데에는 최소한 한 시간은 걸립니다기념관 건물 앞에는 초등학생 키만 한 선생님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선생님의 평소 소탈한 모습을 고려하여 일부러 작게 제작한 동상이라고 합니다저희는 묘소부터 둘러보았는데건물을 지나 미륵산에 있는 묘소로 올라가는 길에 잎이 여덟 손가락이 뻗은 모양을 한 팔손이나무와 흰 동백꽃억새가 저희들을 반겨주었습니다선생님의 묘소는 별다른 장식이 없이 평범하였고통영 앞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하였습니다그곳에서 저희는 잠시 선생님의 정신을 느끼고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기념과 내부 우측 벽에는 선생님의 약력이 사진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선생님께서는 1926년 명정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태어나 계속 그곳에서 사시다가 스물한 살 때 결혼을 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딸을 홀로 키우셨습니다. 1955년 첫 단편인 계산이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발표된 이후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오셨습니다우리에게 익숙한 김약국의 딸들(1963), 토지(1968-1994) 이외에 표류도노을진 들녘과 같은 장편과 불신시대암흑시대와 같은 단편이 있습니다전시실 내부에는 선생님께서 직접 만드셨다는 보랏빛이 도는 진홍색두루마기와 기다란 상이 놓인 집필실을 재연해 놓은 곳도 있었고자필 원고소설에서 동기란 무엇인가에 관한 소설론을 적은 원고도 있었습니다그리고 벽 곳곳에는 선생님의 문학론과 생명사상에 대한 글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저희는 저녁식사 장소인민수사 횟집으로 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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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2] 박경리 기념관 전경




  이튿날 아침에는 일기예보대로 비가 내렸습니다그래도 아직까지는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서 회원 중 몇몇은 아침 산책을 하며 미륵도 주변의 포구와 사람 한두 명이 탈만한 크기의 작은 고기잡이배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졌습니다약속대로 여덟시 반에 리조트 프런트에 모인 우리는 남옥식당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습니다아침부터 그곳은 사람이 많았고 일하는 아주머니의 손길이 바쁘면서도 으레 그렇다는 듯 여유로워 보였습니다간판에는 40년 전통이라는 글이 박혀있었고저희는 자연산 졸복의 그야말로 맑은 국물을 보고 떠먹고 마시고는 재빨리 북적이는 가게를 나왔습니다그리고 김원중 선생님께서 나눠주신 동그랗고 달달한 꿀빵을 먹으며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으로 향하였습니다오늘날 통영이라는 지명은 이 삼도수군통제영이라는 이름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이듬해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함을 만들고 이곳을 창건하였습니다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았고 그 후 제 6대 이경준 통제사가 두룡포에 세병관을 창건하였습니다세병관에서 당시 해군들은 북쪽에 있는 임금님을 향하여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드리고 남쪽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거북선과 해군의 훈련상황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이곳 통제영은1895년까지 존속되다가 일본의 정책에 따라 다른 건물들은 모두 헐리고 이곳 세병관만 남아 초등학교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1975년 이후 세병관 주변의 공방주전 공장 등을 복원하였습니다세병관 외부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역대 통제사의 연혁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썩은 기둥 일부분을 잘라 교체한 흔적과 초등학교를 만들기 위해 팠던 구멍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박경리 선생님을 비롯하여 많은 예술가들이 이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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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통제영 세병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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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 통제영의 사백년 된 느티나무






  저희는 통제사 출구에 있는 통제사만큼의 나이를 먹은 느티나무에게 인사를 드리고 박경리 선생님의 생가가 있는 서피랑으로 언덕을 올라서 갔습니다선생님이 사시던 생가는 한 일반 가족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지금은 그 터만 남았지만 그 집에서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당시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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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5] 박경리 선생님 생가 가는 길



  이어서 우산을 쓴 채로 동피랑 벽화마을을 둘러보고 내친 걸음에 중앙시장도 구경했습니다통영이 물산이 풍부한 고장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이어 서둘러 점심을 먹고 처음 모였던 양재역으로 저녁 여섯 시 경에 돌아와 끝까지 인원수를 세고 쓰레기를 치워주신 선생님우산을 씌워주신 선생님들과 가을밤의 따뜻함을 나누며 헤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