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문학
생태문화연구회: "박완서의 자전소설 속 사회 - 생태기억에 대한 고찰" / "미국 신비평과 남부농본주의"
* 참석자: 권영자, 김길중, 김여진, 김영미, 김요섭, 남진숙, 박찬구, 신문수, 신준환, 안보라, 이규인, 이덕화,
이도원, 이선주, 이영현, 한미야, 황영심
* 일시: 2017년 9월 8일
* 장소: 서울대학교 미국학연구소 소회의실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먼저 지난 1년에 대한 결산 심의와 활동 보고, 향후 모임 계획에 관한 간단한 논의를 진행한 후, 이도원 선생님의 제자이시고 유수한 국제학술지 <Ecology and Society>에 논문을 게재하신 김고운 박사님께서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를 생태학적 시각에서 살펴주셨습니다.
우선 ‘복합적응계’(Complex Adaptive Systems)와 홀링(C. S. Holling)의 ‘복원력’(resilience) 개념을 토대로 한 지역생태시스템과 생태학적 지식 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박사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인생곡선과도 매우 유사하다 할 수 있는 생태계의 적응주기(Adaptive Cycle)에 관해 이해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사람, 장소, 경험’을 세 꼭지로 하는 사회-생태 기억(Social-ecological memory, SEM)의 생성과정은 특히 박완서의 여러 소설에서 확인이 용이한데 박사님께서는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를 예로 살펴주시면서 벌크스(Berkes)의 전통적 지식과 관리체계(traditional knowledge and management system)의 분석단계와 포터와 레빈-도너스타인 등(Potter and Levine-Donnerstein 1999, Hsieh and Shannon 2005)의 직접적 내용분석(Directed Content Analysis)을 응용해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송도 부근 박적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할 무렵까지의 자신의 기억을 복원해낸 이 소설에서는 그 지역의 땅과 식물들(삘기, 찔레순, 산딸기, 칡뿌리, 메뿌리, 싱아, 밤, 도토리, 달개비)에 대한 지식과 ‘둠벙’(물웅덩이 혹은 작은 저수지)이라는 관개시설, 자원순환의 일부로서의 배설, 뒷간에 관한 전통생태지식 등이 촘촘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 동네" 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땅에 대한 애착, 자연과의 친밀감은 이러한 소설의 분석을 통해 더욱 생생히 복원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복원’이라는 것이 단순히 생태학적인 이론이나 경험(practice)과 일대일 대응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인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하는 작업임을 다시 확인해 볼 수 있었습니다.
신문수 선생님께서는 지난 8월 신비평의 발상지인 미국 내쉬빌의 밴더빌트대학을 둘러보신 소회와 더불어 신비평과 남부농본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질박하고 충만된’(homely fullness) ‘세계의 몸’(the world’s body)을 살려내는 것을 시의 주된 목적으로 본 랜섬(John Crowe Ransom)에 대한 개인적인 흥미로 시작된 선생님의 신비평에 대한 관심은 이어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한 랜섬의 제자들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른바 “도망자그룹”(the Fugitives)을 결성한 신비평의 주역들은 그 관심을 정치사회적인 영역으로 확대하여 “남부농본주의 운동”(Southern agrarianism)을 펼치는데 이는 언뜻 신비평의 반역사성, 탈사회성과 어긋나는 행보인 듯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The Kenyon Review, The Southern Review, The Sewanee Review 등의 주요 저널을 발행하면서 신비평을 발전시킨 랜섬과 그의 제자들이 처음에는 시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The Fugitive라는 그룹명칭도 이들이 발행한 시 전문 잡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남부의 감상주의, 지역주의(sectionalism)에서 도망친다는 의미인 “도망자그룹”이 1915년에서 28년까지 주로 자신들의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진 16명의 시인으로 구성된데 비해 “농본주의자들”(The Agrarians)은 1928년에서 35년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친목보다는 통일된 기치를 내세워 결성된 모임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들의 정치사회적 신념은 1930년에 발간된 I’ll Take My Stand: The South and the Agrarian Tradition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1920년대의 거품경제기를 지나 1929년 대공황을 맞으면서 산업주의의 폐해, 자연에 대한 정복과 파괴 등을 목격하고 땅의 경작을 최상의 일로 여기는 농본주의사회의 심미적 삶을 찬양하게 된 당시 이들의 심정은 오늘날 사회가 안고 있는 실업문제, 빈부격차 등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진정성 있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농부들이야말로 철저한 개인주의자들(individualists)이라는 믿음과 “유기적 전체”(Organic Whole)야말로 시의 본질이라는 신비평주의자들의 확신은 산업사회 이전의 미국 남부(The Agrarian South)를 이상화하는 교집합을 보이면서 보완하는 관계에 놓여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비판하면서도 거기에 흡수되는(coopt) 모순적 측면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신문수 선생님께서는 이는 신비평의 밑바탕에 자리한 저항성을 간과한 지나친 평가라고 판단하십니다(이는 뉴딜정책과 같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요인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세계의 몸, 곧 사물의 구체성에 대한 응시를 시의 본분으로 삼고자 한 랜섬은 “유기적 전체”의 개념을 “유기적 통일성”과 같은 것으로 치부하려는 제자들의 경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좋은 시는 ‘논리적 구조’와 함께 언어적 ‘결’(texture)이 긴장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그는 존재의 개별성과 독자성을 존중하고 개인주의를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원리로 수용하는 가장 미국적인 시인이자 비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아쉽게 참석은 못하셨지만 여느 때처럼 맛있는 커피를 제공해주신 김원중 교수님, 최근 위안부 문제를 다룬 책을 영어로 번역하시고 회원들에게 나누어주신 이영현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