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문학
생태문화연구회: "15~19세기, 왜 한반도 생태환경 변화의 결정적 시기인가?" / "과학적 공간, 사이버 공간, 시적 공간-무엇이 삶의 공간인가?"
* 참석자: 강혜순, 권영자, 김동진, 김여진, 김영미, 김요섭, 김이은, 남진숙, 박찬구, 박한제, 신문수, 신준환, 안보라,
이규인, 이덕화, 이선주, 이영현, 이유경, 이종관, 최정은, 허은영, 황영심
* 일시: 2017년 12월 8일
* 장소: 미국학연구소 소회의실
1. 올해 『조선의 생태환경사』라는 역저를 출간하셨던 김동진 선생님께서는 <15~19세기, 왜 한반도 생태환경 변화의 결정적 시기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반론으로 한반도의 생태변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전제하시면서 특히 15-19세기에 생태환경과 한국인의 삶이 큰 변화를 겪었다고 조망해 주셨습니다. 우선 이 기간 동안 포호정책으로 한반도에 서식하던 호랑이의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군사훈련을 위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사슴 류의 수마저 크게 감소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중농정책으로 인하여 소의 사육 두수는 큰 폭으로 증가하고 말의 개체수도 안정적인 규모를 유지하였습니다.
천방(수리시설)과 화전개발로 경작지가 크게 증가하고(15-16세기에 천방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농업개발이 17세기 이후로는 화전 중심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쟁기와 톱 같은 철기사용의 보편화로 인해 생산성이 증대했지만 조선시대의 경작지 면적은 결부(일정한 소출이 있는 토지) 수를 중심으로 파악한 자료가 대부분이어서 정량적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한계 또한 존재합니다. 또한 양란 이후 남발된 화전 개발은 일종의 ‘환경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국가적 재난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산림천택(황무지)은 조선시대 동안 급격히 축소되었는데 고려시대 대부분 활엽수 중심의 원시림이었던 한반도의 생태가 고려 말 과전법의 시행으로 산림이 민간에 개방됨에 따라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즉 참나무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활엽수는 점점 사라지고 소나무 숲이 증가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의 건축자재로 쓰인 나무의 종류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1760-80년의 시기는 전염병의 발생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두드러진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수인성 질병인 ‘이질’은 벼농사를 중시하여 냇가를 개간한 조선이 감당해야 했던 하나의 숙명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미시생태에 관한 선생님의 이야기 중에 사도세자의 눈물이라고 표현하신 ‘고추장’에 대한 설명 역시 흥미로웠습니다. 임진왜란 후 약재로 한반도에 소개되었던 고추가 19세기에 이르러 조선 최고의 인기먹거리가 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인간과 생태환경의 역동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이어 이종관 선생님께서는 <과학적 공간, 사이버 공간, 시적 공간-무엇이 삶의 공간인가?> 라는 주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자세히 살펴주셨습니다.
흔히 듣고 있던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을 구성하는 사물은 유무선 네트워크에서의 end-device뿐만이 아니라 인간, 차량, 교량, 각종 전자장비, 문화재, 자연환경 등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접근해야 하며, 미래에는 Patrick Schumacher가 선언한 대로 미래 첨단기술이 총 융합하는 파라메트릭 건축이 지배적일 것이라는 말씀은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건축물이 우리의 욕망에 따라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구조물로 구성된 파라메트릭 도시가 완성되면 우리의 삶이 체화한 지도는 하나의 풍경화가 될 것이라는 설명은 결국 풍경과 건축 그리고 인간의 삶과 기억이 혼재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궤를 같이 한다고 여겨집니다.
살펴본 OECD국가의 평균 수명 증가율은 ‘그저 생존하는 것이 곧 사람이 살고자 하는 방식은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아울러 인간은 실존적 의미로 가득 찬 ‘풍경’ 속에 거주한다는 사실은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풍경은 나를 통해 스스로를 그린다”고 이야기한 세잔의 말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소와 장소상실』이라는 책에서도 소개되었던 Christian Norberg Schulz는 “건축이라는 작업의 도움으로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런 입장에서 볼 때 ‘soul of Asia’을 천명한 서울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T)와 같은 건물이 과연 시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지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곳이 신성한 곳이고 결국 정주의 장소가 된다는 말씀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이나 이집트의 피라밋(왜 미국의 지폐 속에 도안으로 들어가 있는지?^^)이 바로 그 증거물들이라 할 수 있으며 Agritecture를 표방한 뉴욕의 하이라인 공원(High Line Park)이나 우리나라의 선유도처럼 미래 인간이 거주하게 될 공간은 인간과 공간과 기술이 ‘상호창조’(sympoiesis)하는 시적인 공간이 되기를 모쪼록 바라게 됩니다. 건축가 정기용이 한강을 품은 서울의 삶에 대해서 단순한 ‘치수’가 아닌 ‘물을 품는 삶’을 주장한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