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문학
생태문화연구회: "생태문제를 폭력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 "나무의 본성"
1. 지난 1 월 11 일 금요일에 있었던 생태문화연구회 모임의 후기를 올립니다. 강서정, 강혜순, 권영자, 김길중, 김여진, 김영미, 김요섭, 박지향, 박찬구, 신문수, 우종영, 우한용, 이규인, 이덕화, 이도원, 이영현, 황영심(이상 존칭 생략, 가나다 순) 회원 열일곱 분이 모임에 참석하셨습니다. 최근에 소설집 <아무도 그가 살아 돌아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를 발간하신 우한용 선생님(소설가, 서울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이 “생태문제를 폭력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최근에 <바림>을 발간하신 우종영 선생님(나무 의사, 저술가, 사진작가)이 “나무의 본성” 을 주제로 발제를 맡아주셨습니다.
2. “생태문제를 폭력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우한용 선생님은 소설가가 소설 쓰는 환경, 소설가의 내면을 중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강연은 열 개의 소제목 1. 소설가가 시인 흉보기/ 2. 작품에 맥락을 부여하여 읽기/ 3. 대립적인 세계인식의 한 예/ 4.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사이/ 5. 환경에 대한 관심의 실천/ 6. 소설가의 소설 쓰는 환경에 대한 문제/ 7. 소설가는 자기가 쓰는 소설의 환경에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8. 칼을 가진 자 모두 칼로 망한다/ 9. 누가 칼잽이들을 움직이는가/ 10. 디오니소스를 위한 시간으로 나누어 소설가가 소설을 구성하고 . . .하는 과정을 보여주셨습니다.
환경, 생태를 논의하면서도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기 보다는 중층적으로, 즉 양면대립을 설정합니다. 자연을 예로 들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잔인함’을 함께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자연과 인간, 작품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미술작품을 예로 듭니다. “[미술작품]은 사물이며, 대상이다. 물리적 세계에 뿌리박고, 자리 잡는다. 그 세계의 성격들인, 감각에 지각되는 공간, 물, 형태, 외양 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하나의, 인간적인 가치들의 위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물질적 현실과 정신적 현실이 구별될 수 없을 것이고 형식과 내용도 그러할 것이다. 그 하나를 파악하면, 동시에 다른 하나를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화합물에 대한 설명에 이어 …… ) 미술작품 역시 관찰자에게는, 호기심에 주어지는 참조사항이 되는 그 두 원천을 찾아 올라갈 수 있지만,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충분하며, 이후 그 자체의 힘으로, 자체만의 힘으로 존재하는 작품에 그것이 무슨 대수랴?”(630)라고 르네 위그(René Huyghe)의 『보이는 것과의 대화』 (Dialogue avec le visible)을 인용하여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인간적인 가치들의 위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물질적 현실과 정신적 현실의 통합, 형식과 내용의 통합을 이루면서, 독자성을 유지하는 그런 대상이 미술작품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또한 소설쓰기란 자기 스스로와 한 약속을 지키는 일이며, 그 소설은 무작정 쓰기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쓸 것인가 고심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소설쓰기는 늘 소재와 기법, 두 가지 요건이 길항하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여행은 삶의 환경을 바꾸어보는 일’이며, 나를 나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놓이게 함으로써, 그곳의 자연-풍경-환경-생태가 인간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설 『악어』를 쓰는 동안은 소설의 환경에 소설가 스스로가 폭력을 당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으며, 유태인 600만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나서 한나 아렌트 교수가 내린 결론의 핵심--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악이 늘 우리 주변에 공존한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한 마디로 ‘광신자나 반사회적 인격장애인이 역사적 악행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권력에 순응하며 자신의 직을 수행한 인간의 반성이 결여된 보통인간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역사적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양극 대립을 넘어서는 관점이라야 환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 …… 대립 가운데 움직이고 생성되며 소멸하는 그런 역동적 구조”라야 한다. 또한 “역동적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차이가 나는 두 존재 혹은 힘이 얽혀 돌아가야 한다. 윌림엄 블레이크는 양립을 이야기했지만, 그게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가는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닌가. 그렇다고 주돈이류의 ‘태극도설’에 세계운영의 모든 역동상이 제대로 드러나 있는 것인가는 또 의문”이다, 등 소설쓰는 과정을 예로 드시며 소설가의 내면, 소설쓰는 과정의 환경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3. “나무의 본성”
직접 농사를 지으시고, 아픈 나무를 치료하시는 우종영 선생님은 “以能順木之天 以致基性焉爾” (나무의 천성을 따르고 그 본성이 잘 발휘
되게 할 뿐이다)라고 유자후의 <종수곽타타전>을 인용하며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나무가 제 본성을 잘 발휘하고 잘 살게 하려면 우선 나
무의 천성을 잘 이해하고 따라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나무의 본성이 무엇인지는 소제목 유전자/ 환경과의 접속/ 트라우마으
로 나누어 설명하셨습니다.
(1) 유전자
나무는
- 연결 통로를 만든다.
- 형태를 나눈다.
- 독립적이다: 나무의 어느 부위를 뚝 잘라도 나무 한 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나무 안에 나무가 자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뿌리에서도 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 개체가 떨어지기도 하고 서로 다른 개체가 붙기도 합니다.
- 스스로를 보호한다: 소금기 많은 갯바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잎에 수분을 보관하여 통통해진 잎, 그리고 나무의 가시가 그 예입니다.
- 모든 것을 내어준다.
(2) 환경과의 접속
나무는 더위가 와도 추위가 와도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모습을 바
꿔 환경에 적응합니다.
씨앗의 협동
주변을 살피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는 과정에서도 늘 주변을 살피며 바깥환경과 접속합니다. 나무는 우리 인간과 다른 시간대(시
간 단위)에 살지만, 주변을 살피며 어느 방향으로 가지를 뻗을지 결정합니다.
형태를 바꾸다: 나무는 ‘빛이 디자인하고 바람이 다듬다’는 말이 있듯이, 빛과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형태를 바꾸어
갑니다.
(3) 트라우마
나무가 초식동물을 인식해서 제 잎을 삐죽삐죽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무지: 가로수 뿌리를 짓누르는 시멘트가 한 예입니다.
욕심: 소나무는 사람들이 남긴 송진 채취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사유지 내에 서있는 보호수들은 ‘보호’가 절실한 상태에 있기도 합니
다.
무관심: 나무에 붙인 금속 표찰, 더 이상 뻗을 공간이 없어 제 몸을 휘감은 뿌리.
아름다운 마음: 나무 한 그루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직선 도로 대신, 굽은 도로를 낸 사람의 마음이 감동을 줍니다.
모든 생명체는 모두 흔들리며 결정을 한다: 이제는 우리도 나무와 우리의 관계를 재정의해야 할 때라며 마무리를 하셨습니다.